카테고리 없음 2018. 5. 3. 00:24

아빠 vs 목사님

엄마는 나에게 곧잘 말씀하시곤 했다.

"넌 이제 컸으니까 아빠라고 부르지 말고... <목사님>이라고 불러야 해."


난 엄마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먼저 세우시지 않고, 가정먼저 세우셨어. 그러니까 나한텐 아빠가 먼저야."라고...


오늘 밤엔 아빠와 목사님이 자꾸 떠오른다.

아직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목사님은 많다. 

좋은 목사님도 계시고... 좀 멀리하고픈 목사님도 계시다.

정말 많고 정말 본받고 싶은 목사님도 많다.


한데 내겐 <아빠>는 한분이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빼고 말이다.

그냥 여기저기 보이는 목사님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는 목사님 이전에 아빠이고, 남편이다.

카테고리 없음 2017. 6. 11. 18:44

힘있고 강한 여성

*** < 행복을 낳는 여성 > series입니다.



 

 

"여호와가 새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中에서...

< 힘있고 강한 여성 >
by

 

행복을 낳는 여성의 8번째 조건은 힘을 가진 여성이다.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잠언 31:17)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 가정을 지키며 남편과 자식들에게 행복을 주는 여성은 힘있고 강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약하여 힘없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 아니라 분명히 힘있는 허리와 강한 팔을 가진 여성이 행복을 낳는 여성, 아름답고 덕이 있는 여성이라고 이 말씀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자칫하면 힘있고 강한 여성이라면 능력있고 생활력이 강한 억척스러운 여성을 상상하게 되는데 성경이 말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은 이러한 여성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을 이해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힘과 강함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을 부정한다. 인간적인 것이 바로 죄요. 인간 중심이 죄의 본질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죄의 본질엔 불신으로 인한 두려움이 있고 이것들로 인하여 온갖 죄악이 발생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8) 반대로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 선 사람에겐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하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은 철저하게 자기 부정을 하므로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안에 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영을 가진 여성은 힘있고 강한 여성이며, 다음과 같은 강한 힘을 행사한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안에 거하는 여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평화를,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 평화를 이루며, 이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역경이나 고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분열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러한 여성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가정의 평화를 지켜내고 남편과 자식의 마음에 평화를 준다.

 

현대는 여성에게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주어졌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능력과 힘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렇게 힘이 강한 여성들이 그 수효를 더해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지만 가정들은 점점 평화를 상실하고 불안과 혼돈 속에서 고통하며 방황하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고 있으며 사회는 이로 인하여 더욱 혼란해지고 있다.

 

이러한 가정적 사회 문제는 여성들이 평화를 지키는 힘을 상실한 불행에서 오는 결과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는 아내로부터 평화를 얻지 못하는 남편들, 어머니에게서 평화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 이들로 인하여 환락가의 거리는 넘치고 유흥업소는 성업을 하는 사실로 증명이 된다. 여성 안에 있는 평화. 이것이야말로 가정과 사회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키며, 남편과 아이들을 타락에서 구하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여성들이 이 귀중한 평화라는 힘을 가지고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이웃을 대하기보다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대립하고 투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러한 방법이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하며 여성은 고독해지며 평화는 영영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행복은 영원히 여성의 곁을 떠나 버릴 것이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평화, 이것은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뭇 사람을 다스리고 따르게 하는 절대적인 힘인 것이다. 이 평화야말로 여성이 남성들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며 가장 귀중한 보배인 것이다.

 

여성들에게서부터 오는 평화와 안식의 힘은 남성들의 그릇된 욕망을 바꾸어 정결한 소망에 살게 하는 힘이 있으며 잘못된 권위의식이 바뀌어 올바른 사명에 살게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 힘을 얻는 길은 여성 스스로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의식이 세계를 버림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된 관계 속에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 스스로 자기 중심적 사고와 의식의 세계를 버릴 때 주시는 하나님의 영과의 화합. 거기서 비롯되는 평화를 내것으로 한 여성에게만이 평화를 주고 평화를 지키며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12-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평강을 위하여 부르셨고 그 평강이 모든 사람을 주장케 하심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세계가 이루어지는 진지를 생각할 때 이 평강의 능력을 가진 여성들만큼 힘있고 강하며 또 절대적으로 존귀한 존재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강한 자의 능력과 힘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시지 않는다. 힘으로 이룬 평화는 반드시 또 다른 힘에 의하여 파괴되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평화를 가진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한 자인 여자를 통해서 평화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신다. 약한 자인 여자에게 평화를 주시어 그 평화로 강하다 일컫는 자가 절대로 이루지 못하는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는 오묘한 섭리.

 

그러므로 예레미야 31:22의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여자란 약한 자를 나타냄이니 하나님은 약한 자의 가슴에 있는 평화로 강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약한 자여. 약하다고 방황하여 불신의 길로 가지말고 약하기에 하나님께 의탁할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로 힘을 삼고 강한 자라 일컬으며 평화없는 자들을 그 평화안에 거하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일이요, 이것으로 평화와 안식이 넘치는 새 세계가 탄생한다고 하신 말씀에 어찌 가슴이 뛰지 않으랴.

 

이 말씀을 통해서 약한 자라 불리우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사명을 자각할 수 있으니 평화를 이루는 일인 것이다. 이 평화를 이루는 일을 여성 각자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남편이 지위와 명예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이요, 자녀들을 명문학교에 보내고 좋은 학벌을 차지하게 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자녀들 마음에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부귀도 영화도 아니요, 지위도 명예도 아니요, 바로 평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과 그 본질은 '평화'라 하고 한마디로 잘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행복을 낳는 여성은 평화를 낳는 여성. 이렇게 표현해도 잘못된 말이 아닌 것이다. 이 평화는 어떠한 사람도 용납하여 안고 품을 줄 아는 강한 팔과 가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연약한 여성에게는 평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남편의 잘못도 자식의 잘못도 용납못하는 약하디 약한 여자에게 결코 평화는 머무르지 않는다. 거리를 다니면서 나는 가끔 생각을 해본다. 이 거리를 걷는 여성들의 표정에 평화가 넘쳐 흘렀으면...... 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거리를 걷는 여성들중에서 평화가 넘쳐 있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평강을 주는 얼굴을 찾아보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손톱만큼도 남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차갑고 굳은 표정들은 혹시 잘못하여 조금이라도 부딪치고 밀치는 일이 생기면 칼날같은 감정을 곤두세워 공격해온다. 그러한 여성들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가정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암담해진다.

 

그 가정에 평화스러운 대화가 있을리 없으며 이렇게 평화스러운 대화가 없는 가정에 진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에는 반드시 거짓이 따르는 것. 그러므로 가보지 않아도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거짓으로 자기를 지키려 하며 자녀들은 엄마의 눈치를 살펴 적당히 꾸며대는 말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할 것이니 진실이 사라진 가정에 행복도 사랑도 있을 리가 없다.

 

그 가정은 분열과 단절의 불행만이 있을 것이니 생각만해도 암담해지는 것이다. 실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곳은 평화를 거부하는 절망의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현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평화스러운 생명의 빛을 거부하여 표정없는 인조인간같이, 또는 심장이 멈추고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람의 얼굴에서 보는 사색을 강조한 화장들.

 

평화에는 질서와 조화를 무시한 복장들.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분열증 증상의 예술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평화의 절대적 고귀성과 그 절대적인 힘과 역사를 자각할 줄 모른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이 자각은 능력있다는 정치인이나 학자 또는 군사전문가나 과학자들을 자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 힘 있노라 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도 행복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약하기에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하고 찾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여성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명을 주시고 그 가정에 살리며 거기에서부터 인류를 살리고자 하는 새 역사를 시작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여성에게 인류를 다시 살리는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힘이 있는 여인에게 반드시 따르는 것이 슬기이다.

 

남편을 바로 도우며 자식을 바로 키우고 이웃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가 되는 여인은 모든 면에서 화평스러운 관계를 이루는 데에 슬기는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여인이 있는 곳에 분쟁과 분열이 있는 반면 슬기있는 여인은 남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하여 자식들을 지혜있는 인격을 심어주며 성장시킨다.

 

실로 학벌과 그로 말미암은 지위와 명예보다 더 귀한 것은 지혜이니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어느 직장, 어느 자리에 있어도 필요한 사람이 되며 모든 이의 중심 인물이 되어 화평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이렇게 보람된 삶을 살게 해주는 슬기로운 여인. 내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필요한 남편이 되게 하고, 또 그렇게 남편이 살 수 있도록 지혜를 제공해주는 아내. 또 자네에게도 지식을 주입하고 다른 아이들과 대립시켜 경쟁하여 이기도록 필사적으로 뒷바라지는 못해도 아이들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지혜로 성장시키는 어머니.

 

이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가장 성공된 길.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길이며 아이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의 위에 서서 지도할 수 있는 전인적 인격을 소유한 참된 자도자로 키우는 일이며, 이것이 내 가정의 축복이며 자기 자신의 행복임을 자각 할 줄 아는 슬기로운 여인이 있는 가정과 사회는 화평과 사랑이 넘쳐 분쟁이나 분열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슬기로운 여인을 찾아보기 힘들고 슬기롭지 못한 여인이 많음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남편으로 하여금 나 외에는 부모와 형제도 사랑할 수 없도록 하여 절대로 끊어서는 안될 핏줄 관계를 단절시켜 천륜을 범하게 하는 아내. 나와 내자식 만을 위해서 일할 것을 강요하며 그 외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도 희생이나 봉사는 용납할 수 없는 아내.

 

남편을 내 가정에만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므로 모든 대인관계를 이기주의로 대립하게 해서 진정한 신뢰와 화평을 갖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로 만들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 가정에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슬기롭지 못한 아내.

 

자신의 성공만을 목표로 하여 교육시키며 그 뒷바라지를 하여 키운 자녀가 극도로 이기주의적인 인격으로 성장한 뒤엔 결국 부모와도 단절된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어머니.

 

이런 여인들로 인하여서 대립하고 분쟁하여 황폐해가는 사회에 남편과 자식에게 참 지혜를 제공하여 모든 이와 평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슬기로운 여인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실로 서로 대립하고 단절된 관계 속에서 비롯되는 온갖 사회악을 근절시키는 능력과 힘. 그 강한 팔은 정치인이나 교육자나 경제인이나 군사전문가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남편과 자네에게 지혜를 제공하고 모든 이로 화평케하는 평화를 창조해내는 슬기로운 아내와 사랑으로 인하여서 일하는 힘의 팔을 가진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2017. 5. 8. 00:33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자궁선근증으로 하혈을 한달씩 하고있는 나에게 왜 이런 아픔을 주시는지~
그동안 나에게 여러 병을 치유해주셨는데~
왜 내가 또 아픈건지를
하나님께 여러번 물어봤었다.

어제 아침에 내가 창희가 심심하다고 해서 시편 23편을 암송했다.

어제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갑자기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곽재혁 목사님이 기억이 났다.
곽 목사님은 그렇게 아픈 와중에서도 기도/찬양 하고 있는데~ 난 겨우 이걸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맞아요!
제 잔이 넘칩니다!
찬양할 것들이 더 많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더더더 찬양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2017. 4. 21. 00:15

2017년 부활절

성금요일이었던 지난 금요일
큰이모가 돌아가셨다.

토요일 작은 이모와 함께
부안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 있었을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녀와서 큰이모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찾게되었다.

큰이모의 수의 입던 모습에서
예수님의 수의 입은 모습을~

장례식장에서 큰이모 살아생전 모습을 이야기하며 나누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살아생전 기적들과 가르침들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공식적으로 죽음을 선포했었는데...
살아나셨다니!
정말 기적이었다.

이번 부활주일의 죽음과 부활은
큰이모의 죽음과 연결하니~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2017. 4. 21. 00:08

2017.4.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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